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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세이

3. 총칼로 무장한 조국근대화의 표상 국토종단 경부고속도로 - 전주 가는 여정기



총칼로 무장한 조국근대화의 표상 국토종단 경부고속도로

 


 1968년 1월21일  김일성에게서 박정희 암살을 명받은 김신조 무장게릴라팀이 종로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박정희는 항공사진과 지도를 놓고 2월1일 착공할 경부고속도로 노선을 검토하고 있었다. 서울시와 건설부의 공사예산서를 제끼고 박정희는 정주영의 공사계획을 채택하였다.  청와대로 정주영을 부른 박정희는 '최소공사비를 산출하라'라는 특명을 받는다. 태국에서의 힘든 공사경험을 쌓고 돌아온 현대에게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누구의 명일까 ? 거기에 천부적인 부지런함의 정주영은 그 유명한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산과 들을 작업화와 지프로 직접 뛰어 조사했다. 건설부가 제시한 650억,육군 공병감 490억원, 재무부 330억원,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써낸 180억, 무엇보다도 국가의 특명인지라 이익보다는 손해를겨우 면하는 빠듯한 공사비를 산출해나야만 했다. 정주영은 380억원을 제시하였다. 박정희는 여기에 20억을 더하고, 예비비30억을 추가해 430억을 공사예산으로 확정했다. 공사연장이 328kmdlsl 1km당 1억원이다.   현대는 제일 어려운 구간을 자청해  전체공사의 5분의 2을 맡았다.

  
 시공에는 16개 민간 건설사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했다. 공사비 절감을 위해 미군에게는 통행료를 받지않겠다며 설득해 군 장비를 대거 동원, 군사작전처럼 진행했다. 연인원 892만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전체 7개 공구 중에서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약 70㎞가 최악의 난공사 구간이었다. 그중 옥천 구간은 1.6㎞마다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세워야 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30㎝밖에 뚫지 못하자 인부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일도 벌어졌다. 70년 6월 27일 옥천 구간의 당재터널 공사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완공됐다.

 
 사관학교에서 토목을 공부한  우수한  청년장교들이 청와대로 호출되었다. 이제 위관급에 불과한 젊은 장교들은 숨이 막혔다. 각하께서 부르시다니, 그들에게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암행어사 직책이 주어졌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있을 수 없다. 싼 공사비 때문에 유일한 건설사의 유일한 적자면하기는 공기 단축이었다. 개통 1년 만에 덧씌우기 공사를 했다. 개통 후 10년간 유지보수 비용이 건설 비용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이 단기간에 해치운 토지매입은 중앙정보부가 참여한 군사작전이었다. 목표기일 내에 토지매입을 못하면 관할 행정구역의 도지사, 시장, 군수, 면장은 파리목숨이었다. 토지수용에 끝까지 저항한 토지주에게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은근슬쩍 색깔론 시비를 걸면 그걸로 만사통과였다고 한다. 연좌제가 있던 야만의 세월인데 사돈네 팔촌 중에 좌익 비슷한 것만 나와도 해볼 도리가 없었다.  서울·수원 토지수용 일주일 만에 완료할 정도라니 믿기지 않지만 기록과 증언이 그렇게 전하니 여기 옮겨 적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